모른척하면 안보일까?: 1일1글쓰기-202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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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생각정리

모른척하면 안보일까?: 1일1글쓰기-2022.10.13.

by 찐콕 2022. 10. 13.

무시라는 단어를 고민해보는 요즘이다.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외치는 말 "너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이다. 그래서 단어의 뜻을 찾아보니 우리말표준대사전에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이란 뜻으로 표시된다. 한자를 찾아보니 없을 무(無), 볼 시(視)로 구성된다. 볼 시(視)라는 한자가 궁금해 졌다.

볼 시(視)는 볼 견(見)과 다르다고 한다. 같이 보는 것이지만 볼 시(視)는 똑똑히 보이다, 가만히 계속하여 보다, 자세히 조사하다 등 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볼 견(見)이라는 뜻과 음을 나타내는 시(示)가 있다. 볼 견(見)은 뜻 그대로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쓰이는 단어가 견학, 발견, 의견 등이다. 하지만 볼 시(視)는 직시, 시선, 감시, 무시 등의 단어로 사용된다.

이찬재님이 충주신문에서 쓴 [見(볼 견)과 視(볼 시)은 어떻게 다른가?]에 작성한 칼럼에 시이불견(視而不見)과 시약불견(視若不見)이 있었다. 무슨 뜻일까?

보기는 하되 보지 않는 것을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고 하는데 대학의 정심편-소학, 중용, 대학 등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서책- 에 있는 글로 증자가 쓴 글이라고 한다.- 월든이라는 책에서도 인용했다고 하는데 나는 월든은 안 읽어봤다.- "마음이 흐트러져 있다면(心不在焉), 봐도 보이지 않고(視而不見), 들어도 들리지 않고(聽而不聞), 음식을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食而不知其味).”라고 쓰여진 글에서 시이불견이 있다.

시약불견(視若不見)은 "보고도 못 본 체한다."는 사자성어이다.

나는 고등학교때 같은 중학교 출신끼리 모여서 하는 클럽에 배당된 적이 있다. 같은 중학교 출신 후배들을 선배가 도와준다는 취지의 클럽이었다. 초반에는 선배들이 좋은 말도 해주고 기강도 잡았다. 그때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너희들 선배들 보고 인사도 안하는데 우리가 모르는 줄 알지? 다알아? 다 알지만 얘기안하는 거야."라고 하시는데 속으로 뜨끔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학교로 등산을 하게 되면 저 앞으로 내가 아는 분(?)과 비슷한 사람이 보일때가 있다. 그럼 저분이 그분인... 선배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궁금해서 더 자세히 보면 선배가 맞는 경우가 있다. 그럼 나는 '에이, 거리도 먼데 뭘 뛰어가서 인사해. 저 선배도 불편할꺼야.'라고 생각하며 보고도 못 본 체 했다. 내가 뒤에 있어서 안 보일줄 알았는데 보였다니... 양심이 콕콕 찔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난 그 선배랑 인사 후 있을 그 어색한 시간도 인사 후에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도-같이, 아니면 혼자 뛰어서, 다시 뒤로?- 알지 못하고 불편하니깐 선배도 불편하다고 생각하면서 배려하는 척한 걸지도.


만약 내가 그때 뛰어가서 이야기를 나눴다면 아마 이얘기 저얘기 하면서 선배랑 친해졌다면 나는 선배와 좀 더 다정한(?) 연대를 이어나가면서 알짜 정보를 알았을텐데. 그리고 어쩌면 이런 불편한 추억이 아니라 어색하지만 신기했던 추억이 하나 생겼을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고 어색한 시간이 불편해 미칠것 같았다. 지금은 어색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 사람도 나도 같이 함께 한 추억이 없으니 할 말에 신중해 지기때문이다. 그때 나는 옆에 사람과 대화하기 위해 꺼낼 말들을 조심히 머릿 속으로 스캔한다. 이 말을 하면 너무 개인적일까? 저 말을 하면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다 괜찮은 주제를 찾으면 대화를 한다. 그 어색함이 깨지는 순간이다.

평이한 질문으로는 좋아하는 음식이야기나 동물이야기,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이야기-이건 일반적인 것이다. 너무 특징이 강한 차별주의적 에피소드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나의 경험들을 이야기 하면 좋다. 그러다 보면 상대의 추억이야기도 나오고 나의 추억이야기도 나오고 그러다 우리가 같이 공유한 추억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둘이 만드는 추억이 많이 생길수록 유대감이 생기고 어색함이 친근함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알고 있는데 그때는 몰랐던 방법 중에 하나이다. 다른 사람과 둘이 있는게 어색하다면 추억만들기를 해보자. 물론 내가 그 사람과 어떤 관계가 되고 싶은지가 일순위이지만 나는 모든 사람과 추억 만들기를 하는것도 말 한마디 해보는것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말 한마디가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아도-상처주는 말이나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말은 제외다- 나의 추억도 생기게 된다.

그 하나로 산책을 하고 싶어 무작정 나선 길에서 길을 헤매게 되었다. 그때 밭에 앉아계신 어른신 한분을 보았다. 그 분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네보았다. 그러자 어르신도 대답을 하면서 이야기가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냥 시덥잖은 이야기였다. 나는 여기 처음인데 산책을 하고 싶어서 돌아다닌다는 이야기, 어르신은 겨울이라 따뜻한 햇빛을 받으려고 밭에서 앉아있다는 이야기였다. 그후 그 어르신을 다시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 그곳은 나의 추억의 장소가 되었다.

아마 내가 보고도 보지 못한 체 했던 것 중에서 제일 일순위는 내 마음일 것이다. 나는 '과제를 해야해.'라는 마음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소설을 읽고 싶었다. '평소에는 쳐다 보지도 않았던 소설인데 왜 읽고 싶었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과제를 한다는 중압감을 다른 짓으로 대체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마음을 보고도 못 본체하면서 무시하다 결국 과제를 안하게 되고 점수를 못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른다. 그 과제가 어렵기도 하고 드롭한다고 크게 타격도 없었던 것이 하기 싫다는 마음과 맞물려서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무시당한 내 마음은 아직도 잔재로 남아서 내 죄책감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내가 무시한 내 마음도 이렇게 계속 나를 괴롭히는데 내가 무시한 많은 상황들은 더 크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무시보다는 직시를 선택했으면 좋겠다. 모르겠다면 인터넷이라는 친절한 바다에 들어가보자. 그럼 가끔 해결책이 무수한 정보 중에서 콩알만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자.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장이 빨리오지는 않아도 오긴 할 것같다.-나는 답변해 줄 것 같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다.- 그렇게 직시하는 방법들이 늘어나면 내 삶이 점점 빛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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